성공회 전례 포럼에 대한 제안

...........이글은 성공회 신학-전례학 포럼(http://liturgy.skhcafe.org)에 포스팅한 글을 옮겨왔다.............



전례 포럼을 보면서 느낀점을 몇 문단에 걸쳐 써봅니다. 이곳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저 역시 대부분 눈으로만 보고 적극적으로 포럼에 참여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포럼이 활기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짧지만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 저보다 고민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 짧은 결론은 참여없는 관망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쓸데없는 딴지가 될 지도 모를거란 두려움이 앞섭니다만 용기내어 적어봅니다. 포럼을 보면서 느낀점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를 적어 보겠습니다.


1.전례는 신학적 성찰의 결과를 반영해야한다


하느님 백성의 예배인 전례는 당연히 그 각 구성원의 신앙적인 체험과 이에 대한 해석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성공회와는 다른 전례적 전통을 가진 교회들(천주교, 정교회, 루터교 등) 역시 자신들 나름의 전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왔다고 봅니다. 우리 역시 성공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신앙체험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며 이에 앞서 스스로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신학은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반성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2.신학적 성찰은 context(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학한다고 할 때, 그저 어려운 책이나 난해한 이론만을 다룬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뜬구름 잡는 말장난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이루어질때, 신학이 신학다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전체 성공회 커뮤니티에 대한 신학적 성찰도 의미있지만 적어도 신학적 성찰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나"와 관련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이며 한국에 살고 있는 성공회 신자- 더 구체적으로 나누면 남자/여자/어른/아이/평신도/성직자/수도자 등 나눌 수 있습니다- 입니다. 살아가고 숨쉬는 나 자신과 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시간과 공간이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입니다.


3.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으로서 "나"에 대한 서술을 간과해선 안된다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을 때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유들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대답들은 정답이 아닌 해답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지되고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성공회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기억하고 닮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분과 일치하기를 열망하고 이를 실천하려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 상황과 맥락(Context) 안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예수 그리스도(Text)를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그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가요?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공동체와 함께 해 나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제가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이 어려움을 함께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이 성공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4.개별적 성찰에 대한 "공동체적" 식별이 병행되어야 한다


성공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물을때, 그 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그 구성원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 교회를 드러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닌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나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의 신학적 성찰-거창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더 쉽게 말하면 삶 속에서 만나는 신앙체험에 대한 차분한 정리하고 할 수 있습니다-에 귀기울이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신앙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나아가 우리만의 고유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5.전통과 오늘날의 신앙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매꾸은 것은 우리의 몫이다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전례는 앞선 수많은 (신앙적)체험공동체의 소중한 보화입니다. 우리는 그 보화에 우리의 역사를 더하고 풍요롭게 해야하는 사명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가지고 변화하듯이 전례적 표현들 또한 변화합니다. 전례의 정신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전례의 정신이 바뀐다면 신앙의 대상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전례 정신 즉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 - 연대해야 한다

끝으로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이야기 되는 장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성공회의 정신인 관용과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적어도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 간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두에 전례는 신학적 성찰의 결과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했듯이 우리의 신앙이 전례 정신 속에서 아름답게 꽃피워지길 바랍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 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일원이면도 우리는 영국성공회도 미국성공회도 호주성공회도 아닌 대한 성공회 신자입니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연대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통해 우리의 색깔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면 합니다. 저도 그리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 쓰고 나니 제 글이 구체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추상적인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스스로 작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한 다짐의 글이기도 하며 포럼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도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적은 글입니다.

by 요나 | 2009/02/25 03:37 | 더불어 함께 | 트랙백 | 덧글(0)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1)

흔히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지만 결코 이러한 비판과 힐난을 피해 갈 자신이 없다.  
그나마 무늬라도 그리스도인이라 다행이라 여기며 비열한 자위로 애써 외면할 뿐이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절대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의 가슴을 치며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회문을 나서는 순간
교회 안에서 보여진 순수하고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삶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떨쳐버릴 수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나 자신을 옥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요일 아침 어릴때 부터 길들여진 습관에 따라 교회로 발길을 옮기고
한주일 동안 찌든 내 영혼을 위해 돈 몇푼을 헌금함에 넣으며 듣기 좋고 옳은 소리를 들음으로써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좀 더 고상해진 듯한 착각 속에서 자기위안을 하는 것이 신앙의 실체인가?


분명한 것은 결코 신앙(믿는다는 것)이란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변화를 위해 또다시 교회로 찾아가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가면 뒤에 가려진 참된 자아를 발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교회를 찾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늬만 신자인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표리부동함은 충분히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 던져진 존재(피투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존재(기투하는 존재)이기에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늬만" 이라는 수식어를 피할 수 있다.

방향성을 가진 움직임은 움직이는 주체인 개인의 선택을 바탕으로 한다. 
이제 갓 "무늬만"이라는 수식어를 뗀 상태에서 방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다보니
여전히 교회 안과 밖에서 온전한 판단과 행위의 일치가 일어날 수 없는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남아있는 숙제는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최초에 방향잡은 그 목표를 향해 쉼없이 일관된 선택을 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준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최초의 방향성"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에 있어서 "최초의 방향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 속에 이미 그 해답이 들어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를 따르는 사람이란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야만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 수 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알고 듣고 배운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인물과 동일인이다.
예수라는 인물은 대강 2000년 전 쯤 고대 근동인 지금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역시 그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다.
이러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예수가 살면서 판단하고 선택했던 것을
삶의 기준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나 역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 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아직 "무늬만"이라는 수식어가 채 다 지워지지 않은 수준의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의 "최초 방향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장 먼저 성경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경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성경에 쓰여진 이야기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 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말의 뜻은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예수란 인물의 역사성 보다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한 신앙적 증언에 무게를 둔다란 뜻이다.

앞서 이야기 해듯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한 인물로 보기에 성경에 기술된 예수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며 동시에 그 역 또한 성립되는 셈이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간 "것 처럼" 살아가기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은 어떻게 살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예수와 우리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약 2000년 전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낼 수도 없을 뿐더러
예수가 살았던 그 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답습할 수도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가 살아간 것 처럼 살아가기"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같이 건널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강을 건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신학(엄밀히 말해 그리스도교 신학)이다.

그냥 단순히 믿는데 무슨 복잡한 신학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겠지만
"최초의 방향성"을 잃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신학은 우리에게 좋은 도구이자 길잡이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혹 정말 대단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학의 도움없이도 가능하겠지만
2000년 이상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신학이라는 것이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단지는 분명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최초의 방향성"을 생각할 때 그 유용성을 부정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수단과 목적이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전제가 하에서
적어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취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시금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간 "것 처럼" 살아가기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여기에 한가지 수식어를 덧붙임으로 이 명제를 좀더 구체화 해 보겠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의 핵심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이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를 "지금과 여기"에서 내면화시키기이다.

"내면화"시킨다는 것은 
살아가는 주체인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이것은 단순한 시공간의 개념이 아닌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삶터- 의 특성과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유의미하게 재해석하고 이해되는 작업 일체를 의미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글의 주제와 구성을 파악하고 그 주제와 구성이 같은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새 글을 쓰는 작업에 비길 수 있겠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성경의 내용들은 "나"라는 믿는 개인을 통해 다시 쓰여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최초의 질문에 대한 시원한 답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란 인간상을 틀에 부어 찍어낼 수도 없거니와
세상 어느 누구도 동일하지 않다는 점, 즉 모든 인간 각각이 지닌 유일무이성에 비추어 볼 때에도
결국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그리스도를 향한 자기 결단과 끊임없는 노력이 그 답을 말해 줄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는데로 보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란 완성이 아닌 과정이며, 일관된 선택의 연속이다.


나는 오늘도 "무늬만" 그리스도인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조금씩 움직이려 노력하는 과정 위에 서 있다.
내 삶을 통해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최초의 방향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결심 해 본다.

by 요나 | 2008/12/13 06:03 | 더불어 함께 | 트랙백 | 덧글(1)

겨울비 내리는 검은 오후

어둑한 하늘 아래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차라리 눈이 되어 내린다면 덜 서글픈텐데
누구의 뜨거운 눈물이 12월에 내릴 눈을 비가되어 내리게 했나보다
 
따뜻한 찻잔의 온기가 그리워진다
오래된 친구도 나를 아는 이들도
이제는 보일러 때문에 기억에서 조차 멀어져가는 아랫목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기 보다
힘겨운 현실을 피하기 보다
오늘을 행복하고 기쁘게 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문득 아주 오래전 세상을 살았던 어떤 한 사람이 다시금 떠오르는 날이다
 
밤하늘을 가르며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별똥별처럼
매일의 해를 넘고 달을 지나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에 서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시작과 끝의 경계
12월31일과 1월 1일은 물리적으로 동일한 날들의 반복일뿐
그저 관념의 경계로 존재하며 인간의 마음을 옛것과 새것으로 구분지을 뿐이다

어디 이뿐이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인간이 지어낸 관념과 통념
더 나아가선 사회적 약속으로 자리한 관념의 벽일뿐
 
어차피 새해라 규정된 그 시간을 받아들이려면
이제는 타인들이 만든 관념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편이 올바른 타협점이지 않을까?

다시 자유를 향한 발돋움을 시작하자
바로 오늘 이 순간이 내게 진정 새로운 시작이 되도록

by 요나 | 2008/12/12 07:45 | 짧은 생각 | 트랙백 | 덧글(0)

요나, 그는 누구인가?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

큰 물고기 뱃 속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정의감과 열정은 있으나 겁 또한 많은 사람이다.

감히 하느님께 도전했던 사람 아니 하느님께로 부터 도망가려 했던 사람

그가 바로 요나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란 사람이 바로 그다.

by 요나 | 2008/12/12 06:44 | 짧은 생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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